기본을 지키지 않는 한국사회

나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한국은 부모님과 형제들,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이 살고 있는 내 고향입니다.
그래서 매년 한국에 나가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납니다.
오늘은 한국의 사회에 대해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써보고자 합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사회가 유들이 라는 명목으로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많은 경우 자동차 운전자 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없을 경우 횡단보도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또는 눈치보며 서행으로 지나치기도 합니다.

더우기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교통경찰 조차도 횡단보도에 보행자 신호가 들어왔을 때 내가 운전하던 차를 앞으로 당기라고 명령하여 횡단보도를 지나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지나는 사람도 없었고 그까짓 횡단보도 지나가 봤자 별로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압니다.
아마도 이글을 읽는 독자중에는 내가 너무 그런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통 법규의 문제는 나의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한국에 거주할 당시 나는 수원의 S기업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화창한 날 점심무렵이었고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였습니다.
한 여자아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였고 나는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우고 아이가 건너기를 기다렸습니다.
반대편의 다른 차들도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섰고 내 뒷차도 멈추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깡총깡총 뛰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고요…
그런데 아이가 내 차앞을 지나가던 순간… 내 백미러에 1.5톤 트럭이 2차선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이에게 경고하려던 순간 아이는 깡총거리며 내 차 앞을 지나쳤고 트럭은 바로 횡단보도로 돌진했습니다.
아이를 정면으로 치기 직전, 아이와 차의 간격이 30센티미터도 차이가 안나는 순간 아이는 놀라며 반대방향으로 뛰었고 트럭은 순간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서더군요…
그때 전 트럭이 브레이크가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브레이크가 밀렸다면 아이를 쳤을 겁니다. 하지만 다행이 차는 멈춰섰고 아이는 놀란상태로 바로 반대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에선 서행하며 보행자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게 규칙입니다.
하지만 그차는 간단한 그 규칙을 무시한겁니다.
더우기 다른 차들 약 3~4대가 횡단보도에 멈추어 있는 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규칙을 무시한 대가는 하마터면 어린 생명을 없앴을 수도 있는 겁니다.

내 지인은 변호사입니다.
하지만 내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 한국사회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효율을 얘기하며 사소한 규칙을 무시하는 한국사회를 두둔했습니다.
어쩌면 미국에서 온 사람이 한국사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대한 반발심리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대화해본 많은 지인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는 효율을 들먹이며 규칙을 지키지 않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교통법규조차 무시해도 된다고 교육받고 자란 어린이들이 어찌 커서 큰 규칙은 지킬거라고 생각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찌 큰 규칙을 지킬까요?
작다고 무시하는 사람이 어찌 바른 민주주의를 지킬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왕이 되는 사회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사회는 아이들에게 작은 규칙이라고 무시하지말고 모든 규칙을 지키는 것이 바른 일이라는 것을 교육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도 모든 규칙을 지키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회. 아이들이 규칙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우주의 탄생이론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빅뱅이론 일 것 입니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어떤 응축점으로부터 폭발하며 생겼다는 것으로 아무리 물리학을 모르는 일반인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몇년 전이었나. 나는 친인과 대화를 하다가 아주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된적이 있어서 여기에 써보고자 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빅뱅이론에 대해 가벼운 질문을 하시며 “그렇다면 폭발전에는 어떤 상태인 거야?” 라고 질문하셨고 나는 “폭발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폭발과 함께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게 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공간이 없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설명을 드린 후에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간조차도 없다고 하면 머리속으로 아무것도 없으며 깜깜한 공간을 상상한 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글을 읽으시는 독자분들도 혹시 깜깜하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상상하며, “아~ 빅뱅전에는 이랬구나”라고 상상하시진 않았는 지요?
하지만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같습니다.

어찌되었건, 빅뱅이론에선 시공간은 빅뱅으로 부터 탄생합니다. 즉, 그 이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폭발전을 상상할 땐 정말 머리속에 아무것도 없이 폭발전이라는 것이 없다~ 라고 상상해야 하는 것 입니다.

유아세례는 무었인가

언젠가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물어온 적 이 있었습니다.

“형 나는 유아세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어. 세례라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받는 것이잖아. 그런데 갓 태어난 아이한테 부모의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세례에 대해 평상시에 생각하던 부분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세례에 대한 이 생각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공식적인 기독교의 교리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신약에는 세례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말씀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기 전, 그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의 명령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렇습니다. 이 구절에는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그들을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나는 어떠한 “믿는 자에게 세례를 주라”라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이 명령하신 세례를 주는 행위는, 누구던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거든 세례를 주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가르치라는 것 입니다.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저는 이러한 세례를 주는 행위를 “하나님의 인”을 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제자로 삼는 다는 의미입니다.

자, 이제 다시 유아세례로 돌아 가겠습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잘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세례를 주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인을 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행위는 이제 그 아이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인을 친 것이며 항상 하나님의 보호가 따르게 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유아세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행위인 것 입니다.

저는 목사가 아닙니다. 어떠한 성직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제자로서 저만의 비밀로 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어떠한 곳에서든 어린 아이들을 보면 나는 마음속으로 그 아이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인을 치니 항상 하나님의 보호가 그들의 삶에 함께 있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나의 기도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성령이 항상 그 아이들을 지킬 것 임을 믿습니다.

동성애를 교회에서 반대하는 이유

요몇일 우연찮게도 동성애를 교회에서 반대하는 것에 대한 반박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글은 동성애와 교회에 대해 어떠한 고찰도 없이 쓰여진 글이라 읽어볼 가치도 없었으나 다른 한글은 실제 동성애자로서 고민하는 사람들의 교회에서의 생활과 또 그 차별에 대해 쓴 것이라 논의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글에서는 제 개인적인 생각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는 동성애자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 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캐스트로 밸리에가면 커다란 무지개 깃발과 많은 동성애 커플을 볼 수 있으며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나 동성애자들의 인권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 중의 하나가 샌프란시스코 일 것 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면서 이러한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있어서 동성애는 그다지 멀리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선 동성애는 쉽게 볼 수 있으며 쉽게 문제가 되기도 하고 쉽게 이해가 되기도 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필자의 주변 지인들 중에는 동성애자는 없습니다만 이런 환경에서 살아서 인지, 내주변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항상 염두에 두고 살고 있으며 어쩌면 내가 업무상 또는 이러저러한 일로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도 내가 모르는 동성애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동성애자가 내 옆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은 내게 혐오의 대상은 되지 않으며 특별히 그 사람을 향해서 성경에 쓰여진 대로 돌을 던져 그의 목숨을 취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물론 돌을 던져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미국법에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나름 그 사람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게 동성애에 찬성하냐고 묻는 다면 나의 대답은 “나는 동성애에 반대한다”가 답변입니다.

동성애는 기독교적 관점이던 인류의 보편적 관점이던 나는 동성애가 정상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정상적이란 보통 사람들의 보편타당한 관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동성애를 나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동성애를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남색하는 자를 죽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남색은 호모섹슈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여기서 말하는 남색은 지금의 흔의말하는 동성애와는 다른 의미이기도 하고, 일부 같은 의미이기도 한 것 입니다.

몇천년전의 이스라엘지방, 반드시 이스라엘 지방이 아닌 곳 예를 들어 중국이라던가 심지어 한국에서도 남색은 나타납니다. 그당시 이성간의 성관계에 지친, 더이상 이성간의 성관계에서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성적 욕구를 원하게 되고 그 한 방법으로 남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사실이 아주 잘 드러납니다.

 

(창 19: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 19:2)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창 19:3) 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창 19: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창 19:5) 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 19:6)  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창 19: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창세기 19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두 천사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소돔과 고모라에 이르러 그 마을에 의인이 있는지, 없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소돔과 고모라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롯이 마침 그들을 자기집에 손님으로 초대하여 묵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밤에 마을의 깡패들이 나타나 이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이 바로 그들과 남색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Where are the men who come to you tonight? Bring them out to us so that we can have sex with them.”

이제 이 구절을 보시면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이던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던 이러한 남색하는 문화가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당시의 남색 문화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세계역사에 대해 배운 분들이라면 상식적으로 많은 왕들 또는 황제들이 자신의 곁에 시동을 두었다는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그 시동들의 역할이 단순히 시중을 드는 것 만이 아니고 상당수 밤에 잠자리 시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더이상 여자에게서 성적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더 강한 괘락을 쫒아 어린 남자아이 또는 꽃미남을 찾아 헤매던 남색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경계하며 너희는 남색하는 자들을 돌로 쳐죽여라 라고 하신 성경의 내용이 과연 잘 못 된 것일까요?

나는 성경에서 단호히 남색하는 것을 금한 그 뜻이 옳다고 봅니다.

그러면 지금의 동성애는 어떤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동성애는 두가지 성향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는 옛 성경시대처럼 더이상 이성에게서 성적만족을 얻지 못하여 새로운 성적 쾌락을 동성 또는 다른 곳에서 찾는 것입니다. 다른 곳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성경에서 마찬가지 이유로 수간(동물과의 성관계)를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에서 바라보는 남색하는 자는 수간하는 자와 별다르지 않은 이유입니다. 아마도 글을 읽는 분들은 수간에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남색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또다른 동성애의 유형은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경우 입니다. 이경우는 성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심리적인 문제가 크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동성애를 나름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은 이부분입니다. 요즘의 많은 정보의 홍수속에서 성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경우 그들을 남색하는 자로 치부하고 배척하기 보다는 그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주변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각각의 케이스에 대해 고민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같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적쾌락에 근거한 동성애를 단호하게 배척하고 말살의 대상으로 봅니다. 일부 개인의 성적취향이므로 동성애를 옹호한다면 마찬가지로 수간(동물과의 성행위)을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옹호할 것 입니다. 이둘은 위에 성경적 예를 들었듯이 같은 논리인 것이며 절대 동의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주변에 성적쾌락이 아닌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성정체성을 잘 확립시켜 나가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역할은 동성애를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몇몇 교회나 교단의 행동처럼 동성애를 인정해서도 안됩니다.

동성애 문제는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을 보듬고 그들이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이 동성애를 떠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